
"엄마가 된 뒤로, 내 취향은 사치가 되었습니다"
오랫동안 한 회사를 다니던 한 여성은 쌍둥이를 낳고 경력단절을 겪으며 자기 자신마저 낯설게 느껴졌다고 고백한다.
또 다른 여성은 새벽 두 시, 아이가 깰까 봐 프린터에 두툼한 수건을 겹겹이 덮은 채 교구를 만들며 흐느꼈다.
산부인과 전문의로 일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가방 속에는 립스틱 한 자루, 거울 한 장이 없다는 사실을 마흔이 되어서야 깨달은 이도 있다.
출판사 '작가의 집'에서 출간되는 신간 『내 가방에 내가 없다』(권지연·김순이·김태이·김태희·양혜진·조서연·황별초·황영란 공저),
직업도 나이도 사는 곳도 다른 여덟 여성이 '가방'이라는 사물 하나를 단서로 잃어버린 자신을 다시 찾아간 9개월의 공동 기록이다.
글쓰기 플랫폼 '브런치 스토리'에서 만나 글동무가 된 이들의 책은 출간 전부터 출판계 안팎에서 적지 않은 주목을 받고 있다.
직업도 나이도 다른 8人, 한 가지 공통점은 '나를 잃었다'는 자각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저자 구성의 다양성이다.
13년간 워킹맘으로 달리다 퇴사를 선택한 권지연, 영어학원을 운영하며 한자 글쓰기를 이어 가는 김순이, 13년 차 공무원이자 두 아이 엄마인 김태이, 하루 수십 명의 여성 환자를 만나는 산부인과 전문의 김태희, 원예 강사로 일상의 향기를 전하는 양혜진, 검진센터에서 일하며 자폐 아이를 키우는 조서연, 디자이너 경력의 황별초, 결혼 17년 차 워킹맘 2년 차인 황영란까지. 사회적 위치도 가족 구성도 모두 다르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어느 날 자신의 가방을 가만히 열어 보고 "이 안에 내가 없다"고 자각한 순간이 있었다는 것이다.
가방 안에는 아이의 학원 교재와 간식, 가족의 약, 빛바랜 영수증과 구겨진 휴지만 빼곡했다.
정작 내 립스틱 한 자루, 거울 한 장은 사라진 줄도 몰랐다.

1부 '열어 보다' — 외면해 온 가방의 안쪽을 마주하다
책은 크게 2부로 구성된다.
1부 〈열어 보다〉에서는 그동안 외면해 왔던 가방의 안쪽을 정면으로 마주한다.
산부인과 의사인 저자(김태희)는 첫 월급으로 산 명품 가방의 거대한 포장 앞에서 부모님의 한숨과 환자들의 찡그린 얼굴을 떠올린다.
그리고 십 년이 넘도록 보라색 나일론 가방 하나만 들고 다니던 친정엄마의 가방을 빼앗아 들었을 때 비로소 그 무게를 알게 된다.
디자이너였던 저자(황별초)는 새벽마다 수건으로 프린터를 덮으며 만들어 낸 교구가 정작 아이의 환한 얼굴을 만들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빗소리 하나에 깨닫는다.
원예강사인 저자(양혜진)는 자신을 다그치던 학생 시절의 외로움이 어른이 된 자신에게 어떻게 되돌아왔는지 천천히 들여다본다.
13년차 공무원 저자(김태이)는 학창 시절 모든 시험을 10회독으로 통과하던 자신의 성실함이 어떻게 아이를 옭아매는 불안으로 변했는지를 고백한다.
2부 '다시 담다' — 비워 낸 자리에 자기 이름을 넣는 시간
2부 〈다시 담다〉는 비워 낸 자리에 마침내 자기 자신의 이름을 넣어 두는 시간이다.
영어학원 원장인 저자(김순이)는 27층에 사는 명품을 두른 옆집 엄마와 자신을 끝없이 비교하며 채워 넣었던 면봉 한 박스의 의미를 다시 묻는다.
워킹맘 저자(황영란)은 신생아 집중치료실에서 보낸 32일과 그 뒤로 새벽 6시마다 펼쳤던 책 한 권이 자신을 어떻게 다시 살게 했는지 담담히 풀어낸다.
건강센터 직원 저자(조서연)는 연말정산 서류 사이에서 꺼낸 가족관계증명서 한 줄 — 모(母)와 자(子) — 안에 자신의 인생이 모두 들어 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워킹맘이었던 저자(권지연)는 18년을 자신을 증명해 주던 사원증과 명함이 베란다 박스 속으로 향한 후, 카페의 한 뼘 자리에서, 빨간 머리 앤이 그려진 노트 한 권에서, 다시 자신을 만나기 시작한다.

"가르치지 않아서 위로가 된다"
이 책에는 김미영 한옥 그림책방 대표, 신미경 브런치 작가이자 홈쇼핑 PD, 이은경 슬기로운초등생활 대표 등 세 사람의 추천사가 실렸다.
세 사람이 입을 모은 평가는 "이 책은 가르치려 들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은경 대표는 "책 속의 글은 엄마들의 삶을 무겁고 비장하게만 그리지 않는다"며 "나도 이렇게 살아냈어, 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조용히 내어줄 뿐이라 독자는 첫 페이지를 여는 순간 경계를 풀게 된다"고 평했다.
신미경 PD는 "8인의 섬세한 작가들의 인생 가방을 열어 보는 것은 엄마로서, 아내로서, 딸로서, 며느리로서 거울을 보는 것과 같았다"며 "이 책이 담긴 순간, 그 장바구니는 명품백이 된다"고 표현했다.
9개월의 협업이 만든 '집단 회복의 서사'
여덟 작가는 작년 8월경 처음 모여 본격적인 공저 작업을 시작했다.
각자의 글이 모일수록 작가들은 서로의 글을 정성스럽게 읽고 피드백하는 시간을 거쳤다.
한 작가는 에필로그에서 "내가 내 글에서 불편하게 생각했던 건 모두가 불편해하더라"며 "나보다 내 글을 더 정성스럽게 봐 주는 마음에서 사랑이 느껴졌다"고 회상했다.
또 다른 작가는 "혼자였으면 이미 그만뒀겠지만 함께였으니까 여기까지 왔다"고 말했다.
이는 단순한 공저집을 넘어 한 사람의 회복이 또 다른 사람의 회복으로 번져 가는, 일종의 '집단 회복 서사'로 이 책을 자리매김하게 하는 대목이다.
"당신의 가방을 한 번 더 들여다보세요" — K-여성들에게 건네는 책
『내 가방에 내가 없다』가 특별한 이유는, 누구도 자신이 멋지게 살아왔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산부인과 의사도 새벽 세 시 당직실에서 남편에게 울며 전화를 걸고, 13년 차 공무원도 분유에 구연산 물을 타 먹인 자신을 떨며 마주한다.
늦깎이 원예 강사는 수업 평가 한마디에 무너지고, 자폐 아이를 키우는 엄마는 가족관계증명서 한 장 앞에서 한참을 멈춰 선다.
누구도 모범 답안을 내놓지 않는다.
잘 살았다고 자랑하지 않고, 잘 살아내라고 다그치지도 않는다.
그래서 이 책은 비로소 위로의 자격을 갖는다.
내 가방에 내가 없다 | 권지연, 김순이, 김태이, 김태희, 양혜진, 조서연, 황별초, 황연란 공저 | 작가의 집











